24.05.06 11:04최종 업데이트 24.05.0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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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고궁 뮤지컬 '세종, 1446'이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이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이 충족돼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외교력이 탁월하고 대한제국(1897~1910)의 외교력이 부실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이 외교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외교력 여하에 있지 않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 일본군은 조선 정부를 돕겠다며 7천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은 '일본군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고종시대사> 제3집에 따르면, 그해 6월 8일(음력 5.5) 외교부장관인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임시대리공사에게 "파병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조회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다음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했고, 7월 23일(음력 6.21)에는 경복궁까지 침입했다. 조선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군사행동이었으므로 명확한 침략이었다. 한국 역사학계마저 이를 '파병', '파견' 같은 용어로 서술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침략'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다.

일본은 경복궁 점령을 통해 조선 정부를 손아귀에 넣은 상태에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학군을 진압했다. 그런 뒤 1905년에는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장식했다. 이것이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일제 침략의 역사에서 1910년 못지않게, 1905년 못지않게, 1894년도 중요하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한 이 해는 일제의 군사적 침략이 본격화된 시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경복궁에 포위된 고종 임금을 구출하려 한 사람들은 당연히 항일투사·독립투사일 수밖에 없다.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임최수(林最洙)도 마찬가지다.

경복궁에 갇힌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자, 일본이 위협을 가하며 일으킨 참변이 1895년 10월 8일(음 8.20)의 명성황후 시해다(을미사변). 이로 인한 고종의 공포심 내지는 위기감으로 인해 단행된 일이 1896년 2월 11일(음력 12.28)의 아관파천이다. 이날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아라사공사관(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단독 장악'하에 있던 조선이 '러·일의 공동 장악' 상태로 들어가는 결과를 만들었고, 고종은 이 같은 러·일 세력균형을 활용해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1898년에 러시아가 만주로 눈을 돌리며 발을 떼는 바람에 조선은 다시 '일본의 단독 장악'하에 들어가고, 일본은 이를 기반으로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임최수가 역사 무대의 전면에 나선 시점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중간이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단 한 번에 궁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다. 그전에도 궁을 빠져나오려다 실패한 일이 있다. 임최수는 실패한 그 일에 가담했다. 미수에 그친 춘생문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고종의 신병 확보하기 위해 춘생문 사건 기획
 

193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춘생문(春生門)으로 추정되는 문 ⓒ 국립중앙박물관


임최수는 철종 임금 때인 1853년에 나주 임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병자호란 때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남한산성 수비에 참여한 충익공 임담(林墰)이 그의 7대조다. 임최수의 관직 진출은 늦은 나이에 이뤄졌다. 38세 때인 1891년, 궁궐과 관청의 공사 등을 담당하는 선공감의 종9품 감역관(선공감역)이 됐다.

조선 임금의 명칭과 경칭은 1895년 1월 12일에 주상 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바뀌었다. 그런 개칭이 있은 1895년에 임최수는 대군주 비서실인 시종원의 시종이 됐다. 이 인사 조치는 그가 춘생문 사건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임최수는 시종원경 이재순 등과 함께 춘생문 사건을 기획했다. 2006년에 <사림> 제25호에 실린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논문 '춘생문사건 주도세력 연구'는 "춘생문사건은 을미사변 직후부터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재순과 임최수 등은 전(前)사과 이세진과 전(前)별선군관 김화영 등과 함께 10월 말에 춘생문사건의 전체 계획을 마련하였고, 11월 중순에 세부 계획을 완성했다"고 설명한다.

아무리 임금을 위한 거사일지라도 임금의 동의 없이 일을 벌이면 반역자가 될 수 있었다. 고종의 승인을 얻는 작업은 임최수가 주로 처리했다. "고종은 11월 18일 홍 상궁을 통해 '임최수는 믿을 수 있는 신하며, 대소 신민이 모두 창의를 부르짖으니, 어찌 억누를 수 있겠는가'라는 밀지를 이재순과 임최수에게 내렸다"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임최수의 목표는 일본공사관과 김홍집 친일내각의 감시를 받는 고종을 경복궁 밖으로 빼내는 것이었다. 대군주의 신병을 확보한 일본과 친일내각이 대군주 명의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제동을 걸려면 고종의 신병부터 확보해야 했다.

그렇게 빼낸 뒤에 고종을 미국대사관으로 데려가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이 사건을 미관파천으로 부르는 견해도 있다. 가능성은 높지만 확정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2018년에 <강원사학> 제31집에 실린 장경호 당시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의 논문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춘생문사건 당시 미국의 태도'는 이렇게 설명한다.

"춘생문사건 당시 미국공사관이 하루 종일 열려 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미 국무부 문서와 각종 회고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대거 이 사건에 참여하고 친미파들이 망명하려고 시도했던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가려고 했다는 점은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와 기록에서는 밝혀지지가 않았다."

임최수 등은 일본공사관과 친일 내각의 감시를 피해 상당한 병력을 규합했다. 이도철·김진호·남만리·김재풍·윤웅렬·김재붕 등이 이에 가세했다. 위 김영수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춘생문사건 당일 이도철은 김진호와 남만리 등의 장교를 거느리고 8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선발대를 지휘하였고, 김재풍과 윤웅렬은 1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하여 후발대로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김재붕은 300명의 의병을 동원하여 대궐에서 도망가는 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사대문의 주요 요소에 매복하였다."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보훈부
 

용포를 입은 고종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러시아도 힘을 보탰다. 러시아공사관도 사건 당일 대궐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대궐 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가 김홍집 내각에 제보했고, 김홍집 내각은 일본공사관과 공조하며 항일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항일군이 경복궁 앞에 등장한 날은 1895년 11월 27일(음 10.11)이다. 이날 정부군 800명은 처음에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을 통한 진입을 시도했다. 여의치 않자 이들은 동북쪽 모서리 근처인 춘생문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이름이 춘생문 사건이 됐다. 김영수 논문은 그 뒤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건 당일 김홍집 내각은 대궐 수비병에게 비상경계를 내리며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시위대 병졸 등이 춘생문과 북장문을 통해 진격해 들어오자 김홍집 내각은 대궐 수비병을 동원하여 그들을 막아냈다. 대궐 수비대 대대장 이범래는 성 밖에 있는 시위대 병졸 등을 향해 '대궐 수비병 뒤쪽에 일본 수비대가 포진해 있다'고 위협했다."

고종이 일본의 영향하에 놓이는 것은 조선의 국새가 일본의 수중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고종과 국새를 일본으로부터 빼내 오려던 임최수의 계획은 실패했다. 일본군을 배후에 둔 친일 군대의 벽을 임최수와 그의 동지들은 뚫지 못했다.

임최수가 시도한 일은 76일 뒤의 아관파천으로 결국 성사됐다. 하지만, 그 전에 임최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11월 15일 자(양력 1895년 12월 30일 자) <고종실록>은 그와 이도철이 모반죄가 인정돼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고 알려준다. 두 사람은 가장 높은 형을 받았다.

임최수는 초창기 항일 투사다. 일본군이 1894년에 조선 땅에 상륙한 사건이 '파병' 같은 엉뚱한 용어로 서술되지 않고 '침략'이라는 정확한 용어로 서술된다면, 이 일로 억류된 고종을 구하기 위한 임최수의 행위는 항일독립운동이 된다. 1894년에 벌어진 일본의 침략을 '파병' 쯤으로 서술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임최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다.

아관파천 9일 뒤 고종은 임최수에 대한 공식 평가를 뒤집었다. 그날 고종은 공식 왕명을 통해 임최수의 행동을 정의를 위한 '창의복수'로 규정하고 그의 죽음을 '원통한 죽음'으로 재평가한 뒤 관직과 품계를 회복시켜 주었다. 고종은 왕명을 통해 임최수에 대한 일본과 친일 내각의 평가를 뒤집었지만, 대한민국 보훈부는 아직도 임최수를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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