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5 14:44최종 업데이트 24.05.1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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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들과 산에 갔을 때 얘기다. 조금은 가파른 흙길을 겁도 없이 씩씩하게 올라가는 나를 보고 어떤 중년 남자분이 말했다.

"와, 나보다 더 잘 가네. 대단해, 대단해. 안 보여도 참 잘 가네."


얼떨결에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불과 한 시간 전의 나를 떠올려야 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폴짝폴짝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에 놓인 돌들이 너무 작고 불규칙한 탓에 건널 수가 없어서 한참을 돌아와야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나는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뜻밖의 칭찬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아마도 볼 수도 없는 내가 한 행동이 드물고도 놀라운 일이란 뜻에서 칭찬한 것이리라.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볼 수 없다는 걸 빼고 나면 정말 별것 아니다. 내가 볼 수 있었다면 칭찬은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일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칭찬을 받았을 때 나는 속 좁게도 그냥 웃지 못할 때가 가끔 있다. 그건 내가 볼 수 없다는 걸 떠올려서이기도 하지만, 그 행동이나 결과물보다는 거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은 어려움이나 고통을 알아줬으면 하는 아쉬움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이들도 오르는데 안 보인다고 못 오를 건 아니지 않는가.

찬사, 그리고 아쉬움
 

볼 수 없다는 건 그저 못 보는 것일뿐, 못하는 것이 아니다 ⓒ 김미래/달리

  
그날도 그랬다. 나는 오히려 건너기 힘든 징검다리를 우회해서라도 산행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내가, 그리고 그렇게 힘차게 올라갈 수 있도록 평소 내 몸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은 내가 대견했을 뿐, 가파른 흙길을 거침없이 올라가는 내겐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그분의 말에도 이런 뜻이 숨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많은 장애인은 그들이 이뤄낸 결과물에만 집중되는 비장애인들의 찬사를 아쉬워한다.

시각 장애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에릭 와이헨마이어에게 주로 쏟아진 찬사는 보이는 사람도 어려운 일을 볼 수 없는 그가 놀랍게도 해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찬사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에게 쏟아진 찬사 중 대부분은 그가 보지 못한다는 데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다는 것을 뺀다면, 정작 에릭 와이헨마이어가 받은 찬사는 거의 없는 셈이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데 있어서, 볼 수 있고 없고가 그렇게나 절대적인 요인이었을까? 앞을 볼 수 없는 그가 비장애인도 오르기 힘든 에베레스트뿐 아니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오른 것은 분명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훈련을 받고 노력했으며, 포기하고픈 유혹과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 이겼는지를 알아주는 게 에릭에 대한 좀 더 바람직한 칭찬이 아니었을까.

이야기하다 보니 남 얘기만 할 게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다를 게 없었다. 나도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마음의 눈까지 멀어 있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여전히 자꾸만 오만 잡생각이 들면서 비교하고 따지고 애써 외면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더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다는 다짐 또한 밝히고 싶다.

비교, 그리고 자괴감

그동안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시각 장애인이 쓴 책이나 SNS에 접하기를 꺼렸다. 그 이유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아픔이나 어려움이 이미 내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것이어서 새삼스레 아픔을 떠올리기 싫은 것뿐이라면 뭐가 문제겠는가. 부끄럽게도 나는 그런 이유보다는 그들이 이뤄낸 결과물이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어서 샘이 났고 어쩔 수 없이 비교되면서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지리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와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사하라 사막을 비롯한 250킬로미터 세계 4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시각 장애인도 있고, 중학생 나이에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월스트리트에서 당당히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시각 장애인도 있다. 웬만한 연예인도 몇만 구독자를 확보하기 힘들다는 유튜브에 도전해서 100만 구독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각 장애인 유튜버도 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이들을 접할 때면, 어릴 적 위인전을 읽을 때 느꼈던 그 무력감과 위화감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총명함을 가졌다는데, 하나를 배우면 열 번은 복습해야 간신히 익힐 수 있는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그런 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오만해서 그게 나였다는 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하고 싶은 게 있었다. 희망도 있었다. 그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바라야 했고, 희망을 좇아야 했다. 나는 숲속 산새 소리 가득한 산에 오르고 싶었을 뿐,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나 히말라야를 꿈꾼 적은 없었다. 사막 마라톤도 그저 놀랍고 대단하단 생각일 뿐 하고자 하는 조금의 시도조차 안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애널리스트를 꿈꾼 적이 있었던가? 유튜브를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냥 좋은 거고, 해보면 좋을 것 같기는 했지만, 내 희망 사항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시기하고 질투했을까? 왜 그들의 결과물을 보면서 나 자신을 책망하고 자괴감을 느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도 불행하다고 느끼고 불안해하는 것은 기준이 내가 아닌 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문화 심리학자가 있다. '남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라든가 '남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라'라는 말처럼 자기가 아닌 남을 기준으로 행동이나 선택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도 일률적인 표준을 목표로 삼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적성도 다르고, 하고 싶은 것도 다른데 성공의 조건은 매우 일률적이라고 했다. 남들이 인정하는 직업, 남들이 인정하는 직장과 소득, 남들이 인정할 만한 집과 자동차를 가지는 게 성공이라는 표준으로 설정돼 있다는 것이다.

딱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정작 내가 좋아해서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는데 나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면서도 남들이 보기에 멋지고 훌륭하고 칭찬할 결과물을 낸 이들이라서 시기하고 질투했던 것이다.

다시 들어 봤다. 안 들리던 많은 것이 들렸다.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란 꼬리표만 같을 뿐, 많은 점이 달랐다. 하고 싶은 것도 달랐고 시력을 잃고 놓인 환경도 달랐다. 나처럼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가 아니라 어린 시절, 아니면 적어도 배우는 과정에서 시력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운 좋게 여러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이도 있었고,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헌신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도, 그리고 노력

나라고 다를 게 없었다. 결코 모자란 게 아니었다. 시력과 함께 40년 이상 쌓아온 삶과 경험이 사라진 것만을 탓하기엔 내게 남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배울 기회도 있었고, 도움을 준 사람들도 많았고 새롭게 얻은 혜택도 있었다. 한때 내가 시기하고 질투했던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다른 걸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그들 모두가 가진 것, 그래서 나도 가질 수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시력을 잃은 지점에서 그동안 걸어오던 길이 끝났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길이 되어 자기 꿈에 도전하고 노력했다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그 새로운 길을 가면서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고 고생하고 좌절하고 다시 시작하고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했을까. 그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분명 그들 모두는 그런 결과물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내게도 꼭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 자기 영역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꿈을 갖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거나 자기 영역에서조차 제대로 역할을 못 하는 사람들은 미리 실패할 것을 염려해서 시도조차 못하고 포기해 버린다고 한다.

결국 시각 장애인이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였다. 남이 아닌 내 꿈을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야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떤 결과물이 나온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김미래/달리

 
시 한 편을 외우면서 그동안의 어리석음과 작별하려 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 (정호승 [봄길]중에서)


할 수 있을지, 제대로 된 길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동안 살아온 나, 나를 둘러싼 고마운 이들, 그들과 함께 할 희망을 믿고 일단 가보는 거다. 혹 내가 가는 이 길이 엉뚱한 길이라면 소리 한 번 질러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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