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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씨암탉'으로 불린 이 사람, 종교 때문에 죽었다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등록 2024.05.07 15:21수정 2024.05.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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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동리 교회 마당에 걸린 솥에 쌀을 안치는 문준경 전도사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성전(聖殿. 증동리교회)을 증도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택을 인민위원장 관사로 사용하는 완장 찬 이들의 행동은 오만불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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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초상화 ⓒ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와 여성 신도들을 집안 몸종 다루듯이 했다. 식사, 청소, 빨래 등을 모두 맡기고는 툭하면 '반동'이라는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백정희(1918년생) 전도사를 분주소(지서)에 구금시킨 후에 위협과 공갈, 구타를 일삼다가 최후에는 '자신의 첩이 되어 준다면 살려 주겠다'는 성희롱까지 했던 것이다. (문준경전도사기념관, <순교자 문준경과 그의 사람들>, 2016)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준경은 마치 자신의 머리에 뜨거운 화로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당장 백정희 전도사에게 성희롱한 놈의 뺨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교회의 신도들을 난리 통에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이 그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지옥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이번에는 문준경과 백정희, 그리고 몇몇 신도들이 한꺼번에 분주소에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죄목은 비밀리에 예배를 보았다는 것이다. 문준경과 백정희는 그곳에서 무수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죽음의 땅으로 향하다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증도면 인민위원회에서는 '섬 선교의 어머니'로 알려진 문준경 전도사를 일찌감치 제거 대상 일순위로 명부에 올렸다.

하지만 문준경은 무안군의 유명인사이자 지역민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이였기에 증도면 인민위원회나 분주소 차원에서 제거(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문준경은 1950년 9월 27일 밤 목포행 배에 실렸다. 목포정치보위부로 이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9월 28일 목포에 도착하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UN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된 이날, 목포에 있던 인민군도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이들은 압송한 문준경 일행을 풀어주고 다시 무안군 증도면 증동리로 줄행랑을 쳤다.

문준경은 당시 목포에 피신해 있던 이봉성 목사를 찾아가 증동리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다. 이봉성 목사가 문준경 전도사에게 국군 수복 후에 증도로 돌아갈 것을 강권했으나 그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증도에서 한 명의 신도라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1950년 10월 4일 문준경은 죽음의 땅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기어서 10리를 도망치다

증도선착장에 나와 있는 이들의 얼굴은 흙빛을 한 이들과 홍조를 띤 이들로 확연히 나뉘었다. 증동리 교인들이 '전도사님이 왜 죽음의 땅으로 오시나' 하는 두려움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것에 반해 그때까지 증도에 남아 있던 완장 찬 이들은 '반동(문준경)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기회'라며 환호작약했다.

그날 밤 증동리 한 교인의 집에 모인 이들은 '국군 상륙에 대비'한 일들을 상의했다. 그런데 이런 속삭임이 참석자 중 한 명의 신고에 의해 그때까지 후퇴하지 않았던 분주소원들의 귀에 들어갔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신안군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2023)

참석자 전원이 분주소 유치장으로 연행됐다. 그때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있던 백정희 전도사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중동리교회 교인들과 증도면 유지들은 다음 날 새벽에 뒷결박을 당한 채로 바닷가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 문준경과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터진목이라는 바닷가로 끌려가기 몇 시간 전인 10월 4일 한 무리의 증도 유지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이면서 청년단 활동을 한 조이봉과 아버지가 부자라는 이유로 인공시절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붙잡힌 이호갑이 각각 터진목과 증동리 솔무등 앞 백사장에서 지방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터진목에서 죽은 조이봉의 시신은 오른쪽 가슴 아래에 구멍이 나 있었다.

문준경이 증도분주소 유치장에서 몇 시간 전에 나간 이들의 운명을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짐작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문준경과 백정희가 터진목으로 끌려갈 때 증동리교회 김아무개 집사도 죽음의 대열에 함께 했다. 그녀는 증도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끌려가다가 몰래 대열에서 벗어나 10리(4km)를 기어서 도망쳤다. 결국 그녀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믿음의 씨암탉, 역사에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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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 ⓒ 박만순

 
두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은 어두컴컴했다. 그 중 유일하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평상심을 잃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문준경 전도사였다.

10월 5일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다분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완장 찬 이들은 문준경의 죄목을 열거하고는 이내 '사형'을 선고했다. 그렇다면 문준경의 죄목은 무엇일까.

완장 찬 이들은 문준경을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이라고 했다. 즉 인민의 아편인 종교를 널리 유포시켜 인민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케 한 죄였다. 일반적으로 신안군의 여러 섬을 나룻배를 타고 복음의 씨앗을 널리 뿌린 '전도왕', '섬 선교의 어머니'로 불린 이를 말이다.

'씨암탉을 사형에 처한다'는 고함이 외쳐진 순간 문준경의 입에서는 조용히 기도가 나왔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라"라는 누가복음 23장의 말씀을 낭독했다. 완장 찬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만행을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한 청년이 날카로운 단도로 그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이 반동 ×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문준경은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하며 자신 앞에 서 있는 사형집행인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으니 제발 백정희 전도사만은 살려 주세요"라며 마지막 부탁을 했다.

완장 찬 이들의 꼬나쥔 죽창이 그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을 때 문준경의 입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가 나왔다. 이미 심장이 정지된 문준경의 가슴에 완장 찬 이들은 총알을 발사해 확인 사살을 했다. 문준경의 나이 만 59세였다. 문준경과 증도 지역주민 약 20명이 죽임을 당한 그 날은 새벽달도 부끄러웠는지 터진목 해안가에서 얼굴을 감추었다.

그 와중에 문준경의 마지막 바람대로 백정희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완장 찬 이들이 "총알값으로 몰수할 재산도 없으니 총알 허비하지 말고 분주소로 끌고 가자"고 하며, 분주소로 끌고 갔다가 그곳에서 석방시켰다.

섬 선교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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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 신안군 증도면 터진목의 순교지 ⓒ 박만순

 
문준경은 1891년 전라남도 지도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문재경의 3녀로 태어났다. 현재의 신안군은 조선시대에 지도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무안군으로, 1969년 신안군으로 바뀌었다.

문준경이 태어난 곳은 비록 자그마한 섬이었으나 문준경의 할아버지가 진사였고, 부친은 염전을 하고, 당숙 문재철은 만석꾼 거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문준경은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오촌 당숙 문재철은 그 유명한 '암태도 소작항쟁'의 지주인 그 문재철이다.

유복했던 그의 삶은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7세의 꽃다운 나이인 1908년 결혼한 그는 지도면 증동리로 시집살이를 했다. 남편 정아무개는 결혼 초기부터 집에 붙어 있지 않았고 아내를 '소 닭 보듯' 했다.

둘의 관계를 안타까워하던 시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문준경 부부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자식은 없었고, 시부모의 애틋한 사랑과는 달리 다른 식구들의 혹독한 시집살이가 이어졌다.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얻어 본가에는 두문불출하고 문준경을 아끼던 시부모 모두 작고한 후인 1927년에 그는 목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교회를 접하게 된 그는 1931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목회자 교육을 받았다.

문준경이 천사의 섬 신안군에 복음의 첫 씨앗을 뿌린 것은 1932년 7월 임자도에 진리교회를 세우면서였다. 당시 신학교는 3개월 수업에 9개월의 실습을 해야 했다. 즉 문준경은 1932년 진리교회를 세워 9개월간 목회 활동을 하고 다시 서울에서 3개월간 학교를 다니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그는 이후 증도에 증동리교회를 만들었고, 순교하기 전까지 신안군(당시는 무안군)에 6개의 교회와 여러 개의 기도소를 설립했다. 기도소는 교회간 거리가 멀어 불편한 주민들을 위해 만들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그는 나룻배에 몸을 신고 곳곳의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섬과 섬 사이에 만들어진 노두교를 건너다 밀물이 밀려와 옷을 흠뻑 적셔도 섬지역 선교의 끈을 놓치 않았다. 그런 연유로 그의 생전과 사후에 '섬 선교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죽어야 하나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며 모든 종교를 경원시한다. 북한이나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종교활동을 허용하나, 진정한 의미의 '신앙·양심·종교의 자유'가 허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한반도에서 해방 후 북한의 서북지역 종교인들이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며 대거 월남했고, 이들이 서북청년회 등에 참여해 반공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과의 내적 갈등은 상존했다.

이런 갈등이 폭발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인민군이 남한 지역 곳곳을 점령하면서 인민재판을 벌이며 숙청대상이 된 것은 기독교인,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지주 등이었는데, 기독교인은 그 앞자리에 있게 되었다.

특히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기독교인의 집단학살이 벌어지게 되는데, 충남 논산군 성동면 병촌교회와 전북 완주군 동상면, 전남 영광군 염산교회, 신안군 진리교회 등이 주요 피해를 입은 곳이다. (진실화해위원회,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2021)

이 와중에 문준경 역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죽어도 마땅한가? 어떤 체제에서든 모든 이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한다. 철학과 사상, 이념이 다르다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진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완전한 선의의 사상경쟁이 이루어졌을 때만이 참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준경 #터진목 #정치보위부 #분주소 #씨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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