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린시절 보던 책. 10년 전 구입했다.
▲ < Why 장애와 과학 > 어린시절 보던 책. 10년 전 구입했다.
ⓒ 황서현

관련사진보기

 
현재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초등 학습만화의 대표주자는 바로 'WHY 시리즈'였다. 어릴 적 도서관에서 빌려와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읽던 기억이 난다. 마트에 갈 때마다 도서 코너에서 집어 몰래 장바구에 담기도 했다. 동생과 한 권씩 골라 돌려 읽으며 이 책은 내 방에, 이 책은 네 방에 두자고 티격태격했다.

아마 어린 자녀를 두신 분들이라면 이해하시겠지만, WHY 시리즈는 만화책을 좋아하던 나와, 공부가 되는 책을 읽길 바랐던 엄마 사이의 '합의책'이었다. 당시 가격 11000원으로 저렴하진 않았지만 간이 실험 키트가 붙어있는 어느 학습만화보다는 훨씬 쌌고, 집안을 어지를 일도 없고, 또 나름 학습만화이니 부모님도 만족스러우셨을 것이다.

그 시절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시리즈는 단언컨데 < Why? 사춘기와 성 >이었다. 도서관에 가면 십중팔구 대출 중이거나, 책장 구석에서 너덜너덜해진 채 초라하게 놓여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WHY 시리즈는 사춘기와 성이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관심을 가질 수조차 없었다. 당시 나는 '사춘'으로 만든 '기와성'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뿐이었으니까.

그런 덕분인지 내 눈에 든 건 파란 머리에, 자신이 지닌 장애를 이해하고 멋지게 성장한 주인공 엄지가 등장하는 책이었다. 깐죽대는 꼼지는 조금 얄미웠지만 착하고 활기찼다. 10번도 넘게 읽어 내용을 외우다시피 한 이 책이 바로 < Why? 장애와 과학 >이다.

대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꺼내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는 책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전자책, '브라유 전자책(Braille e-book)'이 등장한다. 브라유 전자책은 2009년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학생들이 제작한 미래 콘셉트 제품으로, 기기 화면에 점자가 올라와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고안한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제품이다.

"브라유 전자책은 책 내용이 화면상에 점자로 도드라져 만져서 읽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개념의 상품인데, 개발되면 기존 점자책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남춘자. Why? 장애와 과학. (2014). 예림당. 94페이지)

실제 시각장애인을 위한 종이 점자책은 두꺼운 종이에 양각 처리해야 하므로 일반 책보다 훨 크고 무겁다. 또 가격이 비싸고, 접근성도 떨어진다. 이런 점자책의 단점을 보완한 아이디어가 브라유 전자책이다. 촉각으로 글을 읽는 점자 체계를 설립한 '루이 브라유'의 이름에서 따온 제품명이다.

당시 어리고 순수한 마음에 책을 읽으며 고민했다. 시각장애인들도 일반 전자책과 같은 크기인 점자책을 들고 다니며,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재미있는 만화책을 쉽게 읽는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쉽게 그림과 글을 볼 수 있으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 또래 도우미 활동(학교에서 장애를 가진 친구를 돕는 역할 내지 활동)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도 더 쉽게 책을 이해할 수 있진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면에 점자가 볼록볼록 올라왔다가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초등학생 때 막연했던 희망사항은, 대학생이 된 지금 차차 실현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제작한 '촉각 디스플레이(haptic display)'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자기기 개발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각광받는다.

이 촉각 디스플레이는 LED를 통해 화면에 입체감을 구성하여 '점자'를 표현하며, 0.1mm 단위로 정밀하게 높이를 제어한다. 즉 시각장애인들에게, 전자책을 통해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까지도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Nature Communications에 기재되었다.
▲ ETRI에서 개발한 촉각 디스플레이의 원리 Nature Communications에 기재되었다.
ⓒ ETRI

관련사진보기

 
그림과 같이 디스플레이는 LED – 하부 광열층 – 상부 가변탄성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LED 층에선, 구역별로 빛의 세기를 조절한다. 이 빛을 흡수한 하부 광열층에서 열이 발생하고, 이 열을 전달받은 상부 가변탄성층은 부드러운 형질로 변화한다. 이때 광열층과 가변탄성층 사이에 공기압을 가하면 부드러워진 가변탄성층이 가열된 정도에 따라 높이에 차등을 두며 부풀어 오르게 되는 원리이다.

ETRI에서 개발한 촉각 디스플레이는 2009년 SADI 학생들이 제안한 점자만 재현가능한 브라유 전자책과 지금까지의 진동, 픽셀의 돌출 등의 방법을 이용한 다양한 디스플레이보다 한 단계 발전해 점자 입체적 이미지까지도 현상 가능한 기술이다. 앞으로 더 개발되면 시각장애인들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 글을 읽고, 그림을 인식하기 쉬워진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디지털 드로잉 기술로 이어지거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는 디지털 기기도 제작될 수 있다. 이렇게 차근차근, 장애의 장벽을 허물어나가는 것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어."

요즘 들어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앱으로 음식을 시켜 먹는 친구들, 전기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는 사람들, 길거리 정리 안 된 킥보드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 모두 편리함, 혹은 불편함에 툭툭 하는 말이다. 어떤 날은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는 길에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께서 유튜브에 로그인하는 법을 물으셨다. 좋아하는 신문사에 구독하고 싶은데, 계정이 있어도 사용하는 법을 모르셨던 탓이다. 또 버스정류장에서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남학생 둘은 소리 없이 지나가는 버스를 놓쳐버려 황망히 쳐다보며 말했다. "요샌 버스가 왜 이렇게 조용히 출발하냐. 라떼는 말이야……."

남녀노소 나이를 불문하고 변화와 발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릴 때 "발명하면 노벨상이야"하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상상 속 기술들이 이제는 정말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 투명망토,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기술들도 점점 발전하는 중이다.

우리 10대, 20대는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성장하고 있다. 기술을 보고, 이해하고, 탐구하며 나아간다. 혹자는 우리가 누리는 기술들이 너무 과하게 발달했고, 오히려 사회와 지구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학기술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다정한 기술'의 발달에는 머뭇거림이 없길 바란다. 어른들이 만들어주신 더 선명해진 화면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마주하며, 세심한 부분까지 챙기고 신경 쓰는 기술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태그:#촉각디스플레이, #WHY책, #시각장애인, #과학기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