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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야채 코너에 상추, 깻잎 옆에 '콩잎'이 있다. 콩잎이 나오면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해마다 이맘때만 먹을 수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콩잎에 잘 구운 삼겹살을 싸서 먹으면 기가 막히는 맛이다.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다음날에 콩잎에 양념한 자리젓을 올리고, 삼겸살을 구우면, 원수같던 남편도 고분고분하게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고소하고 베지근한 맛의 콩잎과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자리젓 그리고 잘 구운 삼겹살을 먹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금새 행복해진다.
 
마트에서 콩잎 두 단을 1,300원에 사고 왔다.
▲ 콩잎 두 단 마트에서 콩잎 두 단을 1,300원에 사고 왔다.
ⓒ 문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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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잎은 너무 크지 않고 초록색이 선명하게 곱고 만져서 부드러운 것이 좋다. 어린잎이 질기지 않고 연한 것, 꼭지 부분을 만져서 억세지 않고 부드러운 것을 고른다. 콩잎은 세 장이 함께하는데, 똑똑 끊고 겹쳐서 쌈을 싸 먹는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콩잎은 억세지기 때문에 딱 지금만 먹을 수 있다.

얼마 전 저녁에 집에서 가족들과 고기를 먹을 때였다. 아이들은 상추와 깻잎에 쌈을 싸고, 우리 부부는 콩잎을 먹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 둘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느닷없이 카톡이 폭주했다.

"꺄. 맛있겠다."
"언제든 오세요. 고기 준비할게요. 콩잎이랑 자리젓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서귀포 사는 언니가 언제 올라오냐고 물었다. 서귀포에서 제주시에 사는 우리 집에 오려면 한라산을 돌아와야 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제주시에 잘 올라오지 않는 언니의 성향을 알고 있는 내가 재차 물었다.

"언니, 정말 괜찮아요? 올라올 수 있겠어요?"
"그럼."


갑자기 저녁 약속이 잡혔다. 장소는 우리 집이었고, 초대 손님은 결혼하기 전에 같이 일했던 언니 두 명이었다. 약속을 잡은 금요일 남편과 아이들에게 이른 저녁을 차려 줬다. 가족들이 저녁을 마칠 때쯤 언니들이 도착했다.

돈만 빼고 다 있었던 25살의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언니들은 버팀목이었고, 나침반이었으며, 가장 든든한 백이었다. 우리는 같은 학원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했다. 두 사람 모두 수학을 가르쳤는데,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한 명은 전형적인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의 모습이다. 안경을 끼고 마른 체형에 깔끔한 옷차림. 항상 50cm짜리 자를 들고 다니며 선을 반듯하게 그렸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고, 칠판에 글씨도 자로 잰 듯 맞춰 썼다.

반면 밝고 환했던 또 다른 수학 선생님은 주름이 풍성한 치마와 원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화려한 손톱과 센스 있는 옷차림, 작고 앙증맞게 예쁜 가방. 커다란 귀걸이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반듯한 언니와 화려한 언니가 대칭을 이뤘고, 내가 밑변이 돼 어울렸다. 일이 힘들 때마다 언니들에게 기댔다. 두 사람은 어떤 날은 싸우고, 어떤 날은 힘을 합쳐 나를 혼내기도 했는데, 언니가 없는 나는 그것도 좋았다.

"콩잎에는 멜젓인데."

반듯한 언니가 말했다.

"콩잎에는 자리젓 아녜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내가 말한다.

"아니지. 콩잎에 멜젓 놓고 밥 싸서 먹어 봐. 진짜 맛있어."
"근데 난 멜젓 안 좋아하는데. 고깃집에서도 멜젓 잘 안 먹어요."
"식당에 가면 꼭 멜젓 고기옆에 올려놓잖아. 끓여 먹으라고."
"그니까. 근데 난 멜젓은 그다지..."

  
고깃집에 가면 작은 양철 접시에 멜젓이 담겨 나온다. 고기를 굽는 동안 멜젓을 불판에 올려 놓고, 취향에 따라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거나 마늘을 넣는다.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멜젓에 푹 찍어 먹는다.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먹는 법이다.

내가 나고 자란 제주 서부 지역 모슬포에는 자리가 많이 난다. 해마다 할머니는 모슬포항에서 자리를 사고 와서 자리물회를 만들고 남은 걸로 자리젓을 만들었다. 자리는 가시가 세서 자리물회를 먹을 때 조심해야 한다. 육질이 단단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할머니는 자리를 굵은 소금에 굽기도 했다. 비닐을 벗기지 않은 자리를 구우면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자리물회를 먹으면 여름이 시작됐다. 금방 한 밥에 자리젓을 놓고 먹으면 그것 또한 밥도둑이었다. 자리젓은 냄새가 강해서 먹고 나면 집 전체에 냄새가 남았다.

"우리 엄마는 자리젓을 끓여서 줬어. 콩잎에 자리젓 너무 맛있는데."

예쁜 손톱의 언니가 말했다.

"근데 우리 그때 왜 그렇게 싸웠지?"
"언니가 맨날 화냈잖아요."
"너도 만만치 않았거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자존심이지 뭐. 하나 쓸데없는."
"그러니까..."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같은 공감에 있으면 부딪치기 마련이다. 말을 하다가도 틀어지고 술 마시다가도 싸웠다. 메뉴를 정할 때 소주냐 맥주냐를 두고도 싸웠다. 눈만 마주치면 싸우고 나서 또 만났다. 나는 이 언니 말도 맞고 저 언니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이쪽에서는 이쪽 얘기를 들었고, 저쪽에서는 저쪽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내 마음대로 안 되면 토라지고, 뾰족한 말로 대꾸했다.

말은 이상한 성질이 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의 말은 기분이 나쁜데 언니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당장 들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니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옳았다. 

언니들이 하는 말속에는 선한 기운이 있었다. 어떤 말도 나를 깔아뭉개는 게 아니라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언니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열 수 있었고, 수긍했으며, 개선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도와주려는 말이었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면서 20년이 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언니들이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콩잎은 나오는 때가 있다. 하우스에서 사시사철 나오는 상추와 깻잎과는 달리 딱 이맘때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더 맛있는 건지도 모른다.

콩잎과 함께 먹는 밥은 보리밥이 좋다. 이왕이면 투박한 상 위에 무심하게 담아내는 게 좋다. 둥글고 꽃무늬가 화려한 스테인리스 밥상이면 더 좋다. 먹으면 입이 얼얼해지는 청양고추를 옆에 두고 먹는다. 콩잎의 비린 맛을 잡아주는 단짝들이다.

콩잎에 자리젓인지 멜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걸 먹으면 된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콩잎에 자리젓인데, 넌 왜 멜젓이야? 가 아니라 넌 그렇게도 먹는구나. 다음에 한번 먹어 볼게.

이렇게 하면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다. 내치는 말보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말을 사용하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것만으로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된다.

내가 언니들에게 배운 것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궁금해하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해 준다. 그래서 언니들을 만나면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위에서 내려보는 게 아니라 같은 높이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 넘어질 만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손윗사람이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몰라서 답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모르고 지나쳤는지 알면서도 외면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20대 후반은 폭풍처럼 요동치는 시간들이었고, 그 안에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는 없었다. 지금에야 언니들이 그때의 나를 참고 견디며 지켜봐 줬다는 걸 알았다. 그때 몰랐던 걸 알기까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모르는 것들도 20년 후에는 알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 하는 실수가 조금씩 줄어들기를 바란다. 나이테가 둘레를 넓혀가듯 마음도 넓어지길 바란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참고] 
- 베지근하다 (제주도사투리) : 고기국물이 진하고, 기름지면서도 구수하게 맛있다 (제주에서는 맛있는 고기국수나 몸국을 먹으면 "베지근하다"라고 말한다.)
- 멜젓 : 서귀포 지역에서 어획되는 큰 멸치를 염장하여 담근 젓갈. 돼지고기를 먹을 때 제주에서는 멜젓을 같이 먹는다.

태그:#콩잎, #자리젓, #멜젓,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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